본문 바로가기

건강

귀지가 말해주는 건강: 건성 vs 습성, 유전자와 영양 상태의 단서

당신의 귀지는 무엇입니까?

 누군가 갑자기 "귀지가 건성이세요, 습성이세요?"라고 묻는다면, 당황할지 모르지만 의외로 이 질문은 당신의 유전자건강 상태를 알아보는 강력한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귀지는 단순히 ‘더러운 분비물’ 정도로 치부되지만, 사실은 우리 몸이 외부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체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생물학적 지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건성 귀지(dry-type earwax)를 가지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습성(wet-type)이 우세합니다. 단지 귀 안에 존재하는 끈적한 분비물이 아니라, 귀지는 유전적 특성과 인종 차이, 땀샘 활동, 영양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여러 연구로 증명되고 있죠.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귀지의 형태를 결정하는 단 하나의 유전자—ABCC11—가 땀 냄새, 유방암 위험도, 탈취제 사용량까지도 좌우한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매일 청소하면서도 의미는 놓치고 있던 이 작은 생물학적 흔적, 귀지에 대해 파고들어 봅니다. 건성 vs 습성, 단순한 차이 너머에 어떤 유전적 비밀과 건강 신호가 숨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귀지 타입을 결정짓는 유전자: ABCC11의 놀라운 이야기

 귀지의 성질은 단순한 개인차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전자 돌연변이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2006년 일본 규슈대 연구팀이 Nature Genetics에 발표한 획기적인 연구는, 귀지의 건성/습성 여부가 ABCC11 유전자의 538번째 염기쌍의 단일염기다형성(SNP: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으로 인해 결정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 유전자의 538번째 위치에 G(구아닌)이 있으면 습성 귀지, A(아데닌)이 있으면 건성 귀지로 나타나며, 우성 대립형질인 G가 하나라도 존재하면 귀지는 습성 타입이 됩니다. 다시 말해, G/G 또는 G/A 유전형은 습성 귀지, A/A는 건성 귀지라는 것이죠.

 이러한 유전자 분포는 지역과 인종에 따라 극명하게 나뉘는데, 동아시아인(특히 한국·중국·일본)은 건성 귀지형(A/A)이 95%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유럽·아프리카 인구는 97% 이상이 습성 귀지형(G형)입니다. 이 현상은 단순한 유전자 우연이 아니라, 진화론적 적응의 결과로 해석됩니다.
 건성 귀지형은 ABCC11 유전자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분비샘이 위축되고, 땀과 피지의 분비량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추운 기후, 체취 억제, 에너지 절약 등이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되었던 동아시아 고산지대나 북방 지역에서 이 유전자형이 유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유전자의 영향은 단순히 귀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ABCC11은 아포크린 땀샘에서도 발현되기 때문에, 겨드랑이 냄새(체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ABCC11 유전자에서 A/A 유전형을 가진 사람은 겨드랑이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이에 따라 탈취제 사용률도 매우 낮습니다. 일본의 한 조사에서는 A/A 유전형 여성의 98%가 평생 탈취제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응답했을 정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유전자형이 성별과 질환에도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ABCC11 유전자가 유방 분비물의 조성에 영향을 미치며, 일부 연구에서는 유방암의 특정 아형과의 연관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유전적 변이가 외모나 체취뿐만 아니라 내분비계, 분비샘 질환, 암 위험성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임상적 의미를 지닙니다.

 결국, 귀지의 상태는 그 사람의 진화적 배경, 유전적 정체성, 생화학적 기능 상태까지도 반영하는 종합적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외이도 속 작은 분비물이 사실상 당신 유전자의 활동 보고서인 셈입니다.


귀지의 영양·면역 정보: 귓속의 마이크로바이옴

 귀지는 단순한 ‘찌꺼기’가 아닙니다. 귀지에는 지질, 단백질, 면역물질, 미생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외부 병원균의 침입을 막고 귀 내부 환경을 보호하는 일종의 천연 방어막입니다. 이 방어 기능은 개개인의 영양 상태, 면역력, 호르몬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변합니다.

예를 들어, 지방산과 콜레스테롤 대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귀지 성분 내 왁스 에스터(wax esters)와 스쿠알렌의 농도에 변화가 생기며, 이는 귀지의 점성과 색깔 변화로 이어집니다.
 또한 귀지 속의 미생물 균총, 즉 ‘귀 마이크로바이옴’도 존재합니다. 이 균총은 건강한 사람과 반복성 외이도염 환자에서 구성비가 달라지며, 일부 균은 항균 펩타이드를 생성해 외부 감염을 억제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이런 귀지 성분의 변화는 종종 비타민 A, E, 아연, 오메가-3 지방산의 결핍과 연결되며, 이들 영양소는 피부 점막과 분비물의 정상적인 방어기능 유지에 필수입니다. 특히 아연은 상피세포 회복에 관여하고, 비타민 A는 피지선의 조절에 깊이 관여하므로, 결핍 시 귀지의 건조함 혹은 과도한 축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지는 단순한 귀 청소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몸의 면역력과 대사 상태를 반영하는 생화학적 창입니다. 귀지를 유심히 보면 몸속의 미세한 균형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귀 속 작은 단서, 몸 전체의 신호

 우리는 몸의 건강을 볼 때 종종 피부, 혈액, 체중처럼 눈에 잘 띄는 것들만 살펴보지만, 귀지처럼 작고 흔한 것에 진실이 숨어 있을 때도 많습니다. 귀지가 건성인지 습성인지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유전적 경로, 체취 성향, 면역 반응, 나아가 암의 위험도까지 연결될 수 있는 생물학적 지표입니다.

 ABCC11 유전자는 그저 귀지만이 아니라, 땀샘·피지선·분비물 대사 전반에 관여하며, 그 기능은 우리의 영양 상태나 호르몬 균형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귀지를 무조건 ‘깨끗이 없애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태도보다는, 주기적으로 관찰하며 건강 상태의 실마리를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귀지가 갑자기 냄새가 심해지거나, 색이 어둡게 변했거나, 형태가 뻑뻑해졌다면 그것은 단지 불쾌함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조용한 구조 신호일 수 있습니다. 다음번 귀 청소를 할 때는, 단순히 닦아내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건강의 단서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